동요 ‘자전거’를 쓴, 아동문학가 목일신

아주 어릴 적 일이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멀었고, 동네의 거의 모든 부모들은 버스비라도 아낄 요량으로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면 자전거를 사줬다. 당시 아이들은 자전거를 배우면 으레 재잘거리며 음악시간에 배운 동요 하나를 불렀다. ‘따르릉 따르릉 비켜 나세요’로 시작하는 ‘자전거’였다. 부르면 흥이 나고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그 동요는 어른이 되어서도 잊히지 않았다.

때로 아이가 세상을 바꾼다. 아동문학가였으며 교사였던 목일신 선생이 동요 ‘자전거’를 썼던 때가 고흥 흥양보통학교(현 고흥동초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1927년이었고, 한글로 글을 쓰는 행위도 금지됐던 시대였다. 목일신 선생은 5년이 지난 1932년 동요 ‘자전거’를 기독교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에 발표했고, 1년 뒤 김대현 선생이 곡을 붙였다. 무려 87여 년의 시간 동안 전 국민의 애창동요로 손꼽힌 ‘자전거’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하늘에 서 본 고흥읍. 한 가운데가 목일신 선생의 모교 고흥동초등학교(옛 고흥 흥양보통학교)다. 선생은 이곳에서 5학년 때 동요 ‘자전거’를 썼다.

 

목일신 동요의 고향, 고흥동초등학교
고흥동초등학교는 목일신 선생이 졸업한 학교다. 지금은 낮게 가라앉은 시골의 작은 학교이지만 어린 천재 아동문학가였던 목일신은 그곳에서 동요를 통해 세상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선생의 동요를 통한 삶의 여정을 기록하듯 고흥동초등학교 교정에는 1977년 제막된 ‘목일신 선생 노래비’가 서 있다. 노래비에 담긴 동요는 ‘누가 누가 잠자나’이다. 이 동요 역시 고흥동초등학교를 다니던 때 썼다. 

넓고 넓은 밤하늘엔 / 누가 누가 잠자나
하늘나라 아기별이 / 깜박깜박 잠자지
깊고 깊은 숲 속에선 / 누가 누가 잠자나
산새 들새 모여 앉아 / 꼬박꼬박 잠자지

어린 막내 여동생이 잠자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쓴 작품이다. 선생은 아이의 눈으로 아이들의 세상을 기록했다.

목일신 선생을 기리는 두 개의 노래비. 고흥동초에 있는 노래비(좌)에는 '누가 누가 잠자나'가, 고흥문화회관 뜰에 있는 노래비(우)에는 '자전거'가 실려 있다.

목일신 선생이 어린 나이에 동요를 쓰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던 아버지 목치숙은 동요 쓰기를 가르치는 방식으로 어린 아들에게 한글 공부를 시켰다. 당시 일제는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특히 문인들의 한글 작품 활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하지만 정치색이 거의 담기지 않는 동시나 동요 작품은 통제가 매우 느슨했다. 그런 이유로 1930년대 어린이잡지 창간이 붐을 이뤘다. 동시나 동요 쓰기는 민족적 울분을 표출하는 일이었으며, 민족혼을 깨우는 행위였다.

동요 ‘자전거’의 탄생도 아버지와 연관이 깊다. 당시 아버지는 고흥 인근 교회들의 순회목사 활동을 하며 선교를 했다. 미국 선교회가 아버지에게 자전거 한 대를 선물하면서 순회목사 활동의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가끔 아버지가 쉬는 날은 아들에게 자전거를 양보해 줬고,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목일신 선생은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고흥동초등학교까지 6km의 길을 신나게 내달렸다. 자전거 위에 오르면 세상을 모두 얻는 기분이었다.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
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
찌르릉 찌르릉 빗켜나세요
자전거가 갑니다 찌르르르릉
오불랑 꼬불랑 고개를 넘어 
비탈길을 스스륵 지나갑니다 //
찌르릉 찌르릉 이 자전거는
울 아버지 사오신 자전거라오
머나먼 시골길을 돌아오실제
간들간들 타고 오는 자전거라오
- 1932년 ‘아이생활’에 발표한 동요 ‘자전거’ 전문

그 시절 자전거는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최고급 승용차쯤 된다. 귀한 자전거를 타면 괜히 어깨가 으쓱거렸고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일신은 시적 영감을 얻어 동요 ‘자전거’를 썼다. 전 국민의 애창동요 ‘자전거’는 그렇게 우리에게로 왔다.

고흥에서는 매년 목일신 선생을 기념하는 동요제가 열린다. ⓒ고흥군

 

민족을 버리느니 동요를 쓰지 않겠다!
목일신 선생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동요를 쓰는 행위를 통해 소극적 민족운동을 했던 그는 전주 신흥학교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고, 학생들의 분노와 독립을 향한 의지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1930년 전주 신흥학교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목일신 선생은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격문을 쓰고, 주도적으로 시위를 이끌었다. 선생은 결국 일경에게 체포됐고, 전주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동요를 향한 열정은 감옥에서도 계속했다. 하루에 한 장씩 주는 휴지를 아껴 여러 편의 작품을 썼다. ‘하늘’, ‘구름’, ‘꿈나라’ 등이 감옥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1930년대까지 지치지 않고 동요 창작을 하던 선생은 어느 순간 글을 아주 버렸다. 당시 일제는 전시동원 체제를 선포했고, 이름난 작가들은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쓰는 일에 대규모로 동원됐다. 민족을 버리기 싫었던 목일신 선생은 절필을 선언하고, 더 이상 동요를 쓰지 않았다.

목일신 선생은 살아서 4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 글의 대부분은 10대에 썼다. 선생의 동요는 우리 문학사에 매우 특별한 선물이었다. 일제가 조선어를 금지했던 시대, 그의 동요는 순수한 동심으로 민족의 슬픔을 달래고, 지쳐 엎드린 조선인들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줬다. 그에게 언어는 민족의 무기였다.

 

목일신(1913~1986)

전남 고흥군 고흥읍 출생. 고흥 흥양공립보통학교(현 고흥동초)에 다니면서 5학년 때 <동아일보>에 동시 ‘산시내’를 발표(1926년)했다.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한 해 〈누가 누가 잠자나〉를 지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가 1개월간 복역했다.  1943년 순천 매산고, 1948년 목포여중·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목일신 선생이 남긴 수많은 동시 중 ‘자전거’, ‘자장가’, ‘비누방울’, ‘아롱다롱 나비야’, ‘산비둘기’, ‘참새’, ‘시냇물’, ‘물결은 출렁출렁’ 등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다(자장가 초6 음악교과서 수록, 누가누가 잠자나 초4 음악교과서 수록). 1960년 이후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해 주로 수필을 썼다. 그의 고향 고흥과 그가 살았던 부천에서 선생을 기리는 사업을 추진되고 있다.

 

글 한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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