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외침이 전하는 ‘공동체 정신’ 민주교육의 ‘씨앗’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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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외침이 전하는 ‘공동체 정신’ 민주교육의 ‘씨앗’ 되다
  • 전남교육소식
  • 승인 2020.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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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우리_ 전남 교직원 3인이 기억하는 1980년 5월 광주, 그리고 오늘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5·18민중항쟁은 광주와 대한민국을 뛰어넘어 세계, 전 인류 공통의 소중한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오월 광주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아픈 현장이자 현재 진행형인 삶의 과정이다. 5·18민중항쟁을 폄훼하고 왜곡하려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진실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1980년 5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세 명의 선생님들을 통해 5·18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상황을 그린 하성흡 작가의 작품 ‘1980. 5. 21, 발포’.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상황을 그린 하성흡 작가의 작품 ‘1980. 5. 21, 발포’.

 

 

보성 노동초 광곡분교 근무하던 새내기 교사
정해직 선생,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 대동정신 보여”

올해로 일흔인 정해직 선생은 1980년 5월 당시 보성 노동초등학교 광곡분교 새내기 교사였다. 선생은 계엄령이 확대된 5월 18일 광주에 왔다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하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5·18 당시 항쟁지도부의 민원부장을 맡은 정 선생은 전남도청 1층 지방과에 사무실을 두고 시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했다. 생필품 공급과 시가지 청소 등 질서유지는 물론, 도청 정문 앞에서 행방불명자와 사망자 신고를 받았다. 시장을 열고 시내버스를 운행하라고 당국에 요구하기도 했다.

정해직 선생은 항쟁 마지막 날, 27일 새벽까지 소총을 들고 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에 붙잡혀 동료들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505 보안대로 옮겨진 선생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다, 죽으면 아무 데나 내다 버려졌다. 지금도 맞았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 고통을 받고 있다.” 선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정해직 선생님

정 선생은 5·18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대동정신’이라고 강조한다. 그때 시민들은 계엄군의 총칼 앞에 하나로 뭉쳤다. 어린 학생, 시장 상인, 노인 등 너 나 할 것 없이 나서 싸웠고, 주먹밥과 피를 나누며 서로를 보살폈다. 항쟁 당시 광주에서는 단 한 건의 강도, 절도가 없었다. 선생은 40년 전 시민들이 보여줬던 희생과 봉사, 저항과 연대, 자치공동체 정신이 6월 민주항쟁과 촛불혁명으로 이어졌고, 이 땅의 민주화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것으로 보았다.

정 선생은 “코로나19로 다들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지만, 국민들은 정부 방침 아래 사재기도 없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국민들에게 많은 격려와 성원을 보내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모범 사례로 꼽히고 있다”면서 “코로나19 극복 과정 속에 광주 오월정신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선생은 내란중요임무종사죄로 1심에서 징역 10년,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10개월 옥살이를 한 뒤 이듬해 4월 풀려났다. 그 때문에 교단에서 쫓겨났다가 83년 4월 특별채용으로 학교에 돌아갔다. 선생은 이후로도 민주교육과 학생자치운동 등을 펼치며 평생을 교육개혁에 헌신했다.

 

 

사회문제에 관심 가진 대학 2학년생
강분희 선생 “여기 있으면 죽는다, 빨리 도망가라”

지난 2월 명예퇴직한 강분희 선생은 1979년 대학에 입학했다. 곧 바로 동아리 ‘흥사단 아카데미’에 가입, 역사와 정치에 대해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며 우리 사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980년 전공 변경을 위해 잠시 휴학했던 대학교 2학년 강분희 학생은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 때문에 좀처럼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이라도 할 생각에 들불야학 청강생으로 들어갔다. 기회만 되면 들불에서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80년 4월부터 전국 대학에서 연일 계속되던 시위와 집회는 5월이 되자 더욱 확산됐다. 강 선생은 “5월 18일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이자는 이야기를 듣고 집회 현장에 갔었다”며 “그때만 해도 군인들이 학생들을 구타할지는 상상도 못했다”고 기억했다. 평화시위를 펼치던 학생들에게 군인들이 갑자기 득달같이 달려들어 마구 때리고 잡아갔다. 선생은 학생들과 시내에 진출해 시민들에게 군인들의 만행을 알리기 시작했다. “지금 기억해보면 종일 헬기가 하늘 위로 돌아다니고 살벌한 분위기였다. 귀가하는 길에도 너무 무서워 버스나 택시도 못 타고 숨어서 집에 갔다.” 집으로 돌아온 강 선생의 귀에 들린 집 밖 소식은 날로 심각해졌다. 20일 밤, 그는 상황을 살피러 후배와 시내에 나갔다.

강분희 선생님
강분희 선생님

중·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대와 함께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행렬에 합류했다. 시위 도중 군인들에게 붙잡혀 온몸을 심하게 맞고 끌려갔다. 이때 어떤 군인이 강 선생을 처리하겠다며 건물(MBC 또는 세무서 추정)로 데려갔다. 그는 쓰러져 있던 선생에게 “당신 같은 여동생이 있는데 여기 있으면 죽는다, 빨리 도망가라”고 피신을 재촉했다. 쓰러져 있던 선생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군인은 어쩔 수 없이 선생을 건물 구석진 곳에 숨겨줬다. 강 선생은 “한참 후 의식을 찾고 머리를 만져보니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며 “천만다행으로 그 군인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기억 때문에 강 선생은 후유증에 시달렸다. 한동안 거리에서 군인들만 봐도 두렵고, 어찌할 바 몰라 온몸을 부르르 떨었었다.

“교사 시절 학생들과 국립 5·18민주묘역에 참배하러 가면 학생들이 탑 위에 새겨진 제 이름을 가리키며 신기해하곤 했다.” 강분희 선생이 말했다.

선생은 교사가 되어 교육공동체 실현에 힘썼다.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를 거쳐 교사협의회-전교조 출범에 헌신하다 89년 해직되고 94년 복직했다. 그는 교육 민주화와 학생인권 신장을 위해 헌신하며 참교육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순수한 열정으로 헌신하고 희생했던 시민들 덕택에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상당히 성장했고 여전히 발전하고 있다”며 “교육계에서도 민주화가 많이 진전됐다”고 덧붙였다.

 

광주 중흥동 살던 8살 어린이
김민수 장학사, “평범한 시민들의 희생, 잊지 않았으면”

전남교육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민수 장학사는 5·18 당시 8살이었다. 그는 광주역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중흥동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중흥시장에서 건어물을 판매했다. 김 장학사는 “그때 대낮에도 광주역 가는 도로가 한산했고,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총소리가 들렸다”고 회상했다.

그의 집 앞에는 장갑차 한 대가 머무르고 있었다. 어린 민수는 장갑차 주변에서 놀다가 아버지께 된통혼이 났다. 집 밖에서는 총소리가 들렸고, 부모님은 며칠 동안 집 밖에 나가지를 못하게 했다. 방 가운데서 솜이불을 덮고 꼭꼭 숨어 두려움에 떨었다. 김 장학사는 지금도 5월이 오면 어머니와 그때 기억을 종종 떠올린다.

“당시 저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상황이 뭔지도 몰랐다. 성장하면서 5·18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진실을 조금씩 알게 됐다.” 김민수 장학사는 대학 시절 ‘5·18집회’에 참석하며 기억의 파편들을 하나둘 복원했다.

“5·18책임자 처벌은 물론,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보며 예비교사인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청년이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교사가 된 후 학생들에게도 바른 역사 인식을 갖도록 지도했다.”

김민수 장학사
김민수 장학사

김민수 장학사는 20년을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지금은 전남교육청 혁신교육과 장학사로 일하며 학생들이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그는 “5·18민중항쟁이 그랬듯, 우리나라가 민주사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핵심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있었다”면서 “이웃과 함께 서로 돕고 살고자 했던 소박한 마음들이 지금의 민주사회를 발전시킨 씨앗이 되었다. 이런 소중한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성훈 사진 마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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