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우는 대역사에 착수했다. 그렇게 하면 서울이 ‘이쪽’으로 옮겨온다고 했다. 굶주리고 헐벗고 천대받아 온 세월이 끝난다고 했다. 썩은 왕조가 무너지고 새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이다. 차별 없이 하얀 쌀밥 먹을 수 있다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첫닭 우는 소리에 맞춰 일을 시작했다. 마음이 다급했다. 머리통만한 돌에 외줄로 구멍 다섯 개를 새겨 부처님 얼굴을 만들었다. 호떡처럼 둥근 돌을 포개 탑을 올렸다. 마눌님처럼 생기고 서방님 면상 같은 부처들이 소나무 아래, 논둑 한 가운데, 산길 입구에 하나둘씩 자리 잡았다. 탑이라고 해서 별건가. 모양이야 어떻든 곧추 세우기만 하면 될 터였다. 오솔길 가장자리, 산 중턱, 검은 숲 속 빈자리에서 못난이 탑들이 우뚝우뚝 하늘을 향해 자라났다. 서편 산자락 중간 마루, 와불 부부를 일으켜 세우면 마침내 천불천탑이 완성된다. 별자리를 가늠해 보니 얼추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힘 한 번 크게 쓰면 대동세상이 열린다. 그런데…….

하늘에서 본 운주사. 오솔길 가장자리, 산 중턱, 검은 숲 속 빈자리에. 못난이 탑들이 우뚝우뚝 하늘을 향해 자라있다.
하늘에서 본 운주사. 오솔길 가장자리, 산 중턱, 검은 숲 속 빈자리에. 못난이 탑들이 우뚝우뚝 하늘을 향해 자라있다.

광주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 화순군 도암면에 있는 절 ‘운주사’의 창건 설화다. 설화의 끝은 ‘실패’다. 누군가가 거짓으로 닭울음소리를 냈다. 와불을 세우기 위해 힘을 모으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땀범벅 눈물범벅인 채로, 더도 아닌 딱 한 토막 부족했던 시간을 원망하고 있을 때 진짜 닭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차츰 날이 밝아 옅은 빛이 골짜기로 스며들었지만, 새 세상과는 상관없는 미명이었다. 새 세상을 열겠다는 꿈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졌다.

운주사는 비밀투성이다. 언제, 누가, 왜 만들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불상과 탑의 양식으로 비밀의 문을 열어 보려 했지만 간단치 않다. 들판과 산에 흩어져 있는 탑과 불상들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은 양식이기 때문이다. 문헌기록 또한 운주사가 ‘있다’는 사실 이상의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다. 고려 초인 10세기 말 창건, 이름은 운주사(雲住寺) 정도가 연구자들이 합의하는 최대공배수이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운주사는 훨씬 더 풍요롭게 세상 사람들과 만났다.

운주사는 1980년대 초에 ‘발견’되었고, 이후 끊임없이 ‘해석’되었다. 얼추 천 년 가량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인근 주민들은 잘 아는 절이었다. 그럼에도 세간의 유별난 관심을 끈 때가 5・18민중항쟁 직후라는 점에서 ‘발견’이라는 표현을 썼다. 전남대 박물관팀의 1차 발굴조사가 1984년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황석영은 운주사의 천불천탑 설화로 <장길산>의 마지막장을 채웠다. 송기숙도 1990년에 내 놓은 <녹두장군> 제3권에서 운주사 설화를 인용했다. 소설계의 두 거장은 새 세상의 도래를 간절히 바랐던 ‘민중의 염원’으로 운주사를 해석했다.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할 대목은 1980년대 이후에 운주사에 관심이 쏠렸다는 점이다. 운주사를 ‘발견’한 주체는 5월 광주의 ‘패배자’들이었다. 그해 봄 열흘 동안의 싸움은 하루 동안 천불천탑을 쌓아 세상을 바꾸려 했던 눈물겨운 무모함과 다르지 않았다. 목이 잘린 채로, 혹은 얼굴만 남은 채로 논밭을 뒹구는 불상은 금남로에 쓰러진 광주시민, 전남도민의 주검과도 같았다. 큰 꿈을 꾸었다가 실패한 흔적이 운주사였고, 5·18이었다. 운주사는 곧 광주였다. 실패만이 실패를 다독일 수 있고, 죽음만이 죽음을 위로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광주의 실패와 운주사의 실패가, 망월동의 무덤들이 운주사의 돌들과 포개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운주사에게 위로받고 운주사에서 다시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시인 임동확은 운주사를 “어딜 가도 환영받지 못한 열망들이 드디어 찾아낸 스스로들의 유배지 …(중략)… 임시 망명정부”라고 노래했다. (주 - ‘몸체가 달아난 불두에-운주사 가는 길2’의 일부)

운주사에는 마눌님처럼 생기고 서방님 면상 같은 부처들이들판과 산에 흩어져 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은 양식이다.
운주사에는 마눌님처럼 생기고 서방님 면상 같은 부처들이들판과 산에 흩어져 있다.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은 양식이다.

운주사의 공식 한자 표기는 雲住寺이다. 전남대 박물관팀의 1차 발굴 조사 때 ‘雲住寺’가 새겨진 암막새 기와가 출토되어 공식성을 얻었다. 천불천탑 설화가 간직하고 있는 ‘민중의 염원’을 중시한 이들은 ‘運舟寺3)’를 선호한다. 雲住寺를 직역하면 구름이 머무는 절이다. 의역하면 꿈(雲)이 주저앉은(住) 절이다. 運舟寺를 직역하면 배(舟)를 부리는(運) 절이다. 의역하면 꿈(舟)을 항해하는(運) 절이다. 구름과 배는 ‘꿈’의 은유다. 어느 이름이든 운주사는 ‘꿈’을 담은 절이다. 雲住寺는 완료형이고, 運舟寺는 진행형이다.

운주사 이야기는 5・18민중항쟁과 판박이다. 첫닭이 울 즈음의 새벽에 이야기가 일단락된다는 점까지 닮은꼴이다. (신군부가 탱크와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전남도청의 시민군 진압작전을 개시한 시각이 5월 27일 새벽 4시였다.) 당초 계림동에 있다가 2004년 현재의 치평동 자리로 옮겨온 광주광역시청사의 건축 개념이 ‘배’와 ‘5.18’ 이다. 청사는 서편의 의회동, 수평으로 놓인 5층 높이의 중앙 민원동, 수직으로 솟은 18층 높이의 동편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돛을 펴고 서쪽으로 항해하는 배의 형상이다. 運舟寺가 광주시청이다.

운주사는 ‘광주정신’을 되새김질하는 역사유적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한 때 운주사는 대학 신입생이나 사회운동 단체들의 필수 답사 지역이기도 했다.

사회성 짙은 작품을 생산해 온 지역의 화가, 작가들은 운주사에서 풍부한 영감을 얻었고, 자기 작품에 직접 운주사를 끌어들이곤 했다. 망월동 5・18 묘지와 운주사를 하나로 묶어 ‘광주여행’을 오는 사람들도 많다.

와불 부부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일어서지 못함으로써 꿈은 지속가능성을 확보한다.
와불 부부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일어서지 못함으로써 꿈은 지속가능성을 확보한다.

운주사 여행의 정점은 와불 부부다. 왜 일으켜 세우지 못했을까, 그 안타까움, 아쉬운 마음이 만들어낸 여백에 내일의 희망이 들어선다. 와불이 일어서면 꿈은 이루어진다. 일어서지 못했을 때 꿈은 계속된다. 와불 부부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다. 일어서지 못함으로써 꿈은 지속가능성을 확보한다. 와불부터가 이미 그렇게 놓여 있다. 진정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울 요량이었다면 산 경사면의 높은 곳에 머리가 있고 낮은 곳이 발이 있어야 옳다. 그런데 거꾸로다. 머리가 아래, 발이 위를 향하고 있다. 일으켜 세울 작정은 애시당초 하지 않고 ‘무너진 꿈’의 형상화에 집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야 이루지 못한 꿈의 간절함을 후세에까지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완성형으로 끝나지 않고 진행형으로 계속 이어질 테니까. 그래야 머물러 버린 구름이 아니라, 항해를 멈추지 않은 배가 될 테니까. 절의 공식 이름은 구름이 머무는 雲住寺이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어쩔 수 없이 꿈을 항해하는 運舟寺이다.

이정우 사진 화순군

 

관련 교과서
초등 3학년 사회과 지역화 교재, 초등 5학년 사회(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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